1944년 7월 16일. 베를린 테겔 감옥. 한 사람이 38세로 책상 앞에 앉아 한 통의 편지를 적었다. 본회퍼. 처형 9개월 전.
친구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같은 곳을 우리도 어렴풋이 안다. 본회퍼 하면 나치 저항을 안다. 39세에 처형됐다.
그러나 그가 처형 직전 무엇을 적었는지는 잘 모른다. 옥중서신. 그것이 평생 신학을 압축한 결다.
편지의 한 지점에서 그는 새 표현을 만든다 — "종교 없는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 종교는 인간이 신을 자기 편의에 맞춰 쓰는 결. 진짜 신앙은 그것을 넘어서는 결.
왜 이런 곳이 그에게 도착했는가. 한 가설은 이렇다. 감옥에 갇힌 지점에서 종교의 모든 외부 형식이 사라졌다. 예배·찬송·교회. 남은 것은 하나님 한 분과 자기 한 사람.
1차 출처에서 그가 직접 적은 한 줄이 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치 그분이 없는 듯이 살아갈 것을 가르치신다" (DBW 8, 533, [PEER 1차, 16단어 번역]). 가장 신앙적인 사람이 가장 무신론자처럼 들리는 결. 그러나 그 곳이 가장 깊은 신앙이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있다. 1960년대 "하나님의 죽음" 신학자들은 본회퍼를 자기들 편으로 가져갔다. 종교 없는 기독교 = 신 없는 기독교.
1차 자료를 보면 결이 다르다. Bethge 표준 평전(2000, [PEER])은 정직하게 분석한다 — 본회퍼는 같은 편지에서 매일 시편을 외웠고 매일 기도했다. 종교를 부정한 게 아니라 종교의 외부 형식 의존을 부정했다.
표면 아래를 들여다보면 다른 곳이 보인다. 본회퍼의 진짜 명제는 이것이다.
성숙한 세상은 신을 "틈 메우는 자"로 쓰지 않는다. 모르는 것을 신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면 신은 어디에 있는가. 답은 — 우리가 모르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결, 그러나 우리가 가장 외면하고 싶은 결(고통·약함·죽음)에 있다.
한국어로 옮기면 어떤가. 동양에서는 한국 함석헌의 옥중 글이 비슷한 곳에 있다. 일제 옥중에서 그는 "하나님은 우리 약함의 곳에 계신다"고 적었다. 두 신앙인이 다른 시대·다른 지점에서 같은 구조를 보였다.
일상에서는 한 강사가 자기가 모르는 지점에서 "이건 신이 아시겠지"로 도망치는 것과 비슷하다. 본회퍼는 다른 곳을 가리킨다. 신은 모르는 곳이 아니라 가장 약한 곳에 있다. 한 우물의 가장 깊은 곳이 가장 어두운 결인 것과 같다. 그 어둠이 곧 물의 깊이다.
결국 한 문장으로 — 본회퍼의 옥중서신은 처형 직전 한 사람이 신앙을 가장 단순한 결로 내려놓은 1944년의 1차 자료다. 종교의 외부 형식 너머, 약함의 곳에 신이 있다. 오늘 한 동작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약한 결 1곳을 떠올리고 그곳에 누가 있는지 한 줄로 적어 보는 것이다. 이 글이 답하지 못한 부분은 본회퍼가 처형 당일 1945년 4월 9일 마지막 한 시간에 무엇을 적었는가다. 다음 단계는 *Nachfolge*(*제자도의 대가* 1937) 정독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