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 현대 철학 비교 · 회전 1 ESSAY 2026-04-30

키르케고르 *Fear and Trembling* 1843 —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을 오르는 사흘의 결

1843년 코펜하겐. 30세 키르케고르가 가명 'Johannes de Silentio'로 한 책을 적었다.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의 사흘. 그가 묻는다 — 신앙은 윤리를 넘어서는가, 아니면 윤리 안의 한 결인가.

1843년 10월. 코펜하겐. 한 사람이 책상 앞에 앉아 가명으로 한 권의 책을 적었다. 가명의 이름은 'Johannes de Silentio' — 침묵하는 요한. 그가 다시 펴 본 본문은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해 사흘을 걷는 결.

같은 곳을 우리도 안다. 누구나 한 번은 이 본문을 읽는다. 그러나 잘 묻지 않는 것이 있다. 사흘 동안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는가. 본문은 침묵한다.

그 침묵 곳에 키르케고르가 멈췄다. 그는 사흘을 다시 쓴다. 한 사람이 자기 아들을 죽이러 가는 사흘. 윤리적으로는 살인이다. 그러나 신은 그것을 명령했다.

왜 이 본문이 그에게 평생의 결였는가. 한 가설은 이렇다. 그는 자기 약혼녀 레기네 올센과의 파혼 지점에서 이 본문을 다시 만났다. 가장 사랑한 자를 떠나는 결정. 윤리와 신앙이 부딪히는 자기 결.

1차 출처에서 그가 직접 적은 한 줄이 있다 — "신앙은 가장 높은 정념(passion)이다" (*Fear and Trembling* 결론, SKS 4, [PEER 1차, 7단어 의역]). 신앙은 이성도 윤리도 아니다. 정념. 한 사람이 절벽에 서서 뛰어내리는 결.

그러나 반대 의견도 있다. 헤겔주의자는 신앙을 윤리의 한 단계로 본다. 윤리에서 시작해 종교로 발전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정반대편을 가리킨다. 그는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라는 표현을 만든다. 신앙은 윤리를 통과한 다음 곳이 아니라 윤리를 잠시 멈춘 결다.

표면 아래를 들여다보면 다른 곳이 보인다. 키르케고르의 진짜 질문은 아브라함이 살인자인가 신앙자인가가 아니다. 그의 질문은 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정념을 아는가다. 헤겔처럼 체계로 아는가, 아니면 자기 사흘로 아는가. 그는 사흘 편을 든다.

한국어로 옮기면 어떤가. 동양에서는 한국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비슷한 곳에 있다. 역사를 체계로 보지 않고 한 사람의 사흘로 본다. 두 사상가가 다른 시대·다른 문화에서 같은 구조를 보였다 — 정념은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상에서는 한 사람이 자기 인생의 결정을 체계·통계로만 푸는 것과 비슷하다. 키르케고르는 다른 곳을 가리킨다. 한 결정에는 사흘의 정념이 필요하다. 마치 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릴 때 두 통은 같은 물이 아닌 것과 같다.

결국 한 문장으로 — *Fear and Trembling*은 신앙이 체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흘이라는 1843년의 증명이다. 윤리·이성·체계 너머의 결. 오늘 한 동작은 자기 인생 결정 1지점에서 "이것을 체계로 풀 수 있는가, 아니면 사흘이 필요한가"를 한 줄로 적어 보는 것이다. 이 글이 답하지 못한 부분은 키르케고르의 정념(passion)이 정확히 어떤 헬라어·라틴어에 닿는가다. 다음 단계는 *Sickness Unto Death*(1849) 정독으로 이어진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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